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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 선 포퓰리즘: 혜화역 시위와 예멘 난민

20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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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 선 포퓰리즘: 혜화역 시위와 예멘 난민

현재 한국 인터넷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성별 갈등이라는 점은 모두가 동의할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주로 자주 들리는 청년층 커뮤니티에서는 이 주제만큼 화끈하게 좌중을 달구는 주제를 아직 본 적이 없다. 몇몇 사이트에서는 성별 갈등에 관한 주제가 너무나 많이 올라오다보니 관련 이슈만을 따로 다루는 게시판을 신설하는 긴급조치를 취하기도 했다(혹은 그 반대로 성별 갈등 이슈를 다루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커뮤니티도 생기고 있다).

내가 주로 들리는 남초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여초 커뮤니티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이 현상 자체를 다루는 컨텐츠들도 점차 늘고 있다. 네이버 블로거이자 만화가인 카광이 그리는 관련 만화를 몇 개 읽어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혜화역 시위: 갈라진 세계  

남녀 갈등 이슈는 지난 6월 9일 혜화역에서 일어난 시위에 거의 정점을 찍었다. 시위 주최 측은 홍대 누드모델 몰래카메라 사건이 신속하게 처리되는 것을 보고 피해자가 남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먼저 5월 19일에 1차 시위를 열었고, 6월 9일에 2차 시위를 열 것을 예고했다. 2차 시위는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을 불러모으면서 자신들의 세를 과시했다(주최 추산 3만명, 경찰 추산 1만 5천명). 이들은 여성의 몰카 피해 사례에 빠르고 강력하게 대처하기를 촉구하면서 “동일범죄 동일처벌”이라는 구호를 내세웠고, 여경과 남경의 비율을 9:1로 맞춰 채용하고 여성 경찰청장, 검찰총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많은 언론들도 이 시위를 소개하였고, 특히 진보 성향 언론은 굉장히 우호적인 논조를 보여주었다.

한겨레, “왜 많은 여성이 모이나?” 혜화역 시위 운영진에게 물었다 (박현정 신민정 기자, 2018. 6. 21.)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49982.html

한겨레, “왜 많은 여성이 모이나?” 혜화역 시위 운영진에게 물었다 (박현정 신민정 기자, 2018. 6. 21.)

남성들이 주로 드나드는 커뮤니티에서는 당연히 이 시위를 좋게 보지 않았다. 시위대 측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패륜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는지 강조했다. 대다수는 시위의 목적과 수단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위대의 구호 중 하나였던 “자이루”는 대표적인 사례다. 주최 측에서는 유명 BJ 보겸이 자주 쓰는 말인 “보이루(보겸+하이루)”가 여성의 성기와 “하이루”를 합성한 여성혐오적 발언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미러링으로 만들어졌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KBS에서 동일한 논조로 보도한 적도 있다). 당연히 남성 네티즌들은 ‘세상에 그러면 보로 시작하는 모든 말을 다 검열해야겠네?’하면서 역시 온갖 창의적인 드립들로 응수했다.

그 중에서 단연코 가장 큰 화제성을 띤 것은 인기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 BJ인 ‘액시스 마이콜(마재)’의 방송이었다. 마재는 ‘언론이 결코 보도하지 않는 남혐 시위의 진실을 내가 보도하겠다’라며 단신으로 시위 현장을 찾아갔다. 시위대 측은 모든 촬영을 거부하면서 행인들의 핸드폰도 검열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영상 중계를 하는 마재에게 불똥이 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마재는 과거 판례를 인용하면서 집회 및 시위를 보도하는 데 있어서는 초상권이 적용되지 않으며, 자신의 얼굴만 방송하고 있는데 문제될 게 무엇이느냐고 반문하였다. 마재는 이후 1시간가량 집회 현장 주변에서 방송을 계속했고, 경찰의 요청으로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얼추 수십만 명이 되는 사람들이 이 방송을 보았고 각종 커뮤니티의 여론은 마재를 칭송하면서 페미니즘의 현실에 눈을 감는 언론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관심을 끌어모으고 숱한 논쟁을 불어일으킨 시위였지만, 관련 논의수준은 그에 크게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이미 남성 혹은 여성 측이 대변하는 주장과 여론이 너무 극명하게 갈렸다. 두 집단이 인식하는 세계부터가 너무 달랐다. 그래서 합의점과 중간 지대를 만들기도 어려워보인다. 어느 한 쪽의 주장을 채택할 경우 다른 쪽과는 필연적으로 아주 피곤한 언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큰 문제였다. 더 성숙한 논의로 발전할 기회조차 차단된 것이다.

(혜화역 시위에 관한 서술을 편파적으로 느낄 독자가 계실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남성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워낙 논쟁적인 사안이니만큼 여러 글을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예멘 난민’ 사태로 대동단결  

그런데 인터넷 여론은 정말 갑작스럽게 아예 다른 이슈로 넘어갔다. 무비자 체류 제도를 이용하여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 500여명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가 쟁점으로 부상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여론도 빠르게 파악될 수 있었다. 제노포비아적 내용을 담고 있는 청원은 청와대 측에 의해 삭제되었지만, 상당한 청원자를 모은 상태였다.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외국인 혐오증(外國人嫌惡症) 혹은 외국인 혐오(外國人嫌惡)는 외국인 또는 이민족 집단을 혐오, 배척이나 증오하는 것을 말한다. 제노포비아(Xenophobia)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방인이라는 의미의 ‘제노'(Xeno)와 혐오를 의미하는 ‘포비아'(Phobia)가 합성된 말이다. (출처: 위키백과 – ‘외국인 혐오증’)

현재 난민법, 무사증입국, 난민신청허가를 폐지해달라는 청원은 현재 시각(2018. 6. 25. 오후 1시) 40만 명 이상이 청원에 동의한 상태다. 여기에는 무슬림 이민자들에 대한 공포가 크게 작용했다. 난민을 받은 유럽이 고충을 겪고 있고, 테러와 범죄에 노출됐으며, 무슬림은 내부적으로 융화되지 않고 샤리아(이슬람교의 율법, 규범 체계)를 계속 고수하는 사람들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상황이 흥미롭게 돌아간 것은 그토록 으르렁대던 남초 커뮤니티와 여초 커뮤니티가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한 목소리를 보여주면서였다. 남초 커뮤니티와 여초 커뮤니티의 ‘단결’은, 개인적으로는, 외집단과 투쟁을 통해서 내집단의 사회적 결속력을 확보한다는 피터 터친의 이론을 떠올리게 할만큼 인상적이었다.

이슬람 모슬렘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이슬람 문화가 얼마나 여성에 적대적인지 강조했다. 아마도 이번 예멘 난민의 다수가 젊은 미혼 남성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예측한다. 남초 커뮤니티들은 특별히 성별의 관점에서 접근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을 받는 것은 몹시 위험하다는 정서만큼은 아주 확실히 공유했다. 디씨인사이드의 시대 이래로 이런 식으로 커뮤니티 대통합을 보게 될 줄은 나도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참 인터넷 재밌게 돌아간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가려운 면이 분명 있었다. 이 일련의 사건이 여론 지형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까도 말했듯이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마재의 생중계를 공정한 관점에서 기술했다고 여겨진 글을 아직까지 보진 못했다. 예멘 난민에 관한 이야기까지 흘러가자 흐름을 따라잡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여초와 남초의 대단결쯤 되자 생각지도 못한 이슈들이 연계되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역시 뭔가 잡힐듯 말듯 잡히지 않는 ‘떡밥’을 구성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페이스북 게시글들이나 보던 와중에 갑자기 이 모든 이야기들을 맞출 퍼즐을 찾은 느낌을 받았다. 여성들이 예멘 난민에 대해서 갖는 두려움(혹은 혐오)의 감정이 올바르진 않더라도 아예 터무니 없이 부당한 것은 아니라는 변호의 글이었다. 이런 글 자체는 찾아보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권력관계에 반대하고 소수자와 연대한다는 여성주의가 어떻게 제노포비아에 가담할 수 있느냐는 성토 글도 몇 개씩 따라왔다. 나는 이 논쟁이 여초, 남초, 그리고 난민 사태를 이어주는 하나의 고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오르는 포퓰리즘

2018년 세계에서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포퓰리즘의 부상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그중 2016년은 21세기 포퓰리즘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해도 될만한 해였다. 브렉시트의 통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이 연달아 일어나며 대서양 양안을 강타한 것이다.

Gage Skidmore, Donald Trump, CC BY SA_compressed https://flic.kr/p/9hHrit

Gage Skidmore, “Donald Trump”, CC BY SA

그 전에는 에스파냐의 포데모스(Podemos, 우린 할 수 있다. 2014년 1월 16일에 창당된 스페인의 좌익 정당) , 그리스의 시리자(급진좌파연합)로 대표되는 좌파 포퓰리스트들이 남유럽에서 집권을 하면서 포퓰리즘의 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에서 각각 대안당과 국민전선의 약진, 이탈리아에서 오성운동과 북부동맹의 연정 등으로 포퓰리즘은 유럽 전체를 뒤흔드는 트렌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에 걸쳐 안정적인 정치 경제를 운영해오고, 공산주의의 도전마저 물리친 서구 사회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부의 도전에 마주친 것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많은 분석가가 처음에 경제적인 원인을 지목했다. 이 분석에 따르면 세계화와 기술 혁신은 서구 사회의 중산층을 붕괴시킨 것이 포퓰리즘의 원인이었다. 제1세계 중산층은 자유로워진 자본, 노동의 이동과 인력을 대체하는 기술발전의 파고에 가장 크게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90년대 이후로 줄곧 멕시코나 아랍계 이주민,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의 노동자, 그리고 로봇에 밀려나기만 했다. 바로 이들의 분노가 트럼프, 샌더스, 브렉시트 등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시각에 공감하며 관련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이라는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서 사람들은 경제적 원인에 모든 것을 귀인시키는 설명이 지나치게 투박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불평등의 확대와 안정적 일자리의 축소가 포퓰리즘으로 향하는 분노를 만들어낸 기저의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몇몇 사람은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의외로 살만한 사람’일수록 트럼프를 찍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곧이어 경제적 현실과 매개된 수많은 요인이 제시되었다. 인종차별 의식, 미디어 효과, 기성정치 질서에 대한 불만, 정치적 올바름(PC)에 대한 염증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무엇이 가장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까? 이 문제에 답을 제대로 내리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포퓰리즘은 현재 미국이나 유럽 일부 국가에만 국한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도 꽤 오래 지속될 것 같은 세계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은 것 같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남유럽의 좌파 포퓰리즘 이전에는 개도국이 포퓰리즘의 물결과 마주쳤다. 태국의 탁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터키의 에르도안 같은 이들 말이다.

즉, 시간적으로 보았을 때 2000년대 개도국의 불안정한 민주국가에서 시작된 포퓰리즘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남유럽의 주변부 선진국으로 확대했고, 2010년대에는 세계 최고 중심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포퓰리즘이 이처럼 다양한 지역에 퍼지다보니 개별 사회의 맥락이 포퓰리즘 운동에 강하게 개입하고 있어 하나의 단일 요인을 뽑아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터키의 이슬람주의와 미국의 트럼프주의와 에스파냐의 포데모스를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포퓰리즘을 분석하는 데 장점이 되어주기도 한다. 여러 사례를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뽑아내는 것 또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미 몇몇 학자은 현대 포퓰리즘의 물결 속에서 길을 잡는 데 유용할 몇몇 이정표들을 내놓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들은 대체로 다음 요소를 포퓰리즘의 주요 인자로  꼽는다.

  • 경제적 불안
  • 소셜 미디어(SNS)의 확산
  • 정치제도와 시민의 분리
  • 대표성 없는 전문 관료의 막강한 권한
  • 초국적 문제의 부상과 국제협력의 확대
  • 이주민의 물결과 본국의 인구변천 등

개인적인 판단으로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줄 말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불안감’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기 전에 우선 계속 말하는 포퓰리즘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이 잘 안 되는 말인 데다가 직관적으로 그 의미가 와닿지 않아 남용되는 경향이 있는 용어기 때문이다.

존 주디스의 [포퓰리즘의 세계화]는 논쟁적인 이 단어를 그럭저럭 간명하게 정의해준다. 포퓰리즘의 세계관은 국민을 배신하는 ‘타락한 엘리트 집단’과 소외받는 다수의 선량한&nbsp